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죽음과 논란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Vincent-van-gogh-echo-pontoisien-august7-1890.jpg|width=100%]]}}} || || {{{#white '''고흐가 자살하였다는 속보를 담은 기사 (1890년 8월 7일)'''}}} ||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프랑스제 권총인 7mm의 Lefaucheux à broche [[리볼버]]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으며, 즉사하지 않고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척추에 걸려 손상을 입은 채 피투성이로 무려 거리가 1.6km에 달하던 Auberge Ravoux[* 이 여관과 오베르 마을 전체가 현재는 고흐 테마 관광명소이며, 고흐의 묘지도 이 마을에 있다. 여관에는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앉았다는 의자도 있으며, 고흐를 제외해도 마을이 경치가 매우 좋고 파리에서도 가까운 편이니 파리에 있을 때 시간이 난다면 당일치기로 들러 보자.] 여관으로 와서 쓰러졌는데, 여관 사람들이 두 명의 의사를 데려왔고 총알을 빼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고흐를 찾아왔으며, 고흐는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식도 있었고 스스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곧 고흐는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직전 테오에게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것이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 라고 말한 기록이 테오의 일기에 남아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같은 해 11월 23일 [[빌럼 3세]]의 서거에 포커스가 맞혀져 있었다.][* "집에 가고 싶다"(혹은 "죽고 싶다")라고 유언을 했다고 설명한 전기도 있다.] 너무 비참하게 맞이한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반 고흐마저 정신병이 생겨서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2월 25일]] 서른 넷의 나이로 형의 길을 따라갔다. 형처럼 직접적인 자살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살이나 다름이 없는 죽음이었고 형제는 비참한 [[시대]]의 희생자가 되며 나란히 곁에 묻혔다. 빈센트와 테오 두 형제의 죽음에 [[매독]]이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매독은 그 당시에는 워낙에 흔한 질병이었으며, 무수한 예술가들이 이 병으로 시달렸기에 예술가라면 당연히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에 따라 매독에 걸리고도 장수한 경우도 있는데,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고야]]는 매독에 걸리고도 82살까지 장수를 누리고 갔다. 그러나 매독설은 신빙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 견해다. 고흐의 발작 증세는 매독과 무관하고, 테오의 죽음은 형의 죽음에 의한 충격과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그가 권총 자살이 아닌 살해당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가설은 2015년 2월 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652762|다루었다]]. 2014년에 총상 분석 전문가인 범죄과학자 빈센트 디 마이우 박사는 고흐가 동네 청소년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맞았는데 그는 그 소년들에게 죄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가장했다고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1126601021|주장]]했다. 사람을 좋아하던 고흐의 성미로 본다면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반론이 있지만, 박사가 주장했던 증거 1 - 권총이 사라짐, 증거 2 - 총알이 몸을 관통하지 않았다, 증거 3 - 화약 반응이 없었다 등, 이 3개만 본다면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총기 기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거니와, 특히 증거 2와 3을 정확하게 해명한 사람도 없다. 이것을 조금 변형해서 사냥꾼들의 오발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고흐가 쏜 리볼버는 1965년에 발견되어 경매에 6000만 원이 넘는 금액으로 낙찰되었다. 심지어 일본의 한 고흐 연구가는 '''고갱이 고흐를 죽였다'''라는 비약이 아주 심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에 의하면 고갱은 고흐가 여전히 자신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하며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귀 자른 사건 등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난 상황에서 고갱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갱은 고흐가 자신을 찾도록 명분을 만들려고 고갱과 고흐를 모두 잘 알고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자 자신의 측근인 라발에게 엽총을 주고 오베르의 고흐 숙소에 몰래 가서 갖다두고 오게 했다는 것이다. 고갱의 계산은 엽총을 보면 고흐는 자살 충동이 일어서 엽총을 쏘아 자살 시도를 할 것이지만 엽총의 성능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중상을 입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고흐는 고갱을 찾게 될 것이고 고갱은 고심하는 척하다가 중상을 입은 고흐를 위해서 찾아가는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이야기지만 대부분의 고흐 연구가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갱은 작가로서의 생의 대부분을 타히티 섬에서 보냈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빴다. 고흐의 삶에서 고갱이 미친 영향에 비해 고갱의 삶에서 고흐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냥 같이 그림 그리던 괴짜친구 정도? 게다가 고흐가 자살에 사용한 총은 엽총이 아니라 권총이었다.[[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60713120343968&RIGHT_COMM=R5|기사]] 또 다른 고흐 연구가 고바야시 히데키는 저서 "고흐의 증명"에서 그의 대표 자화상 중 하나인 왼손잡이 자화상이 정교한 위작이라 주장하면서, 이 배후에 테오의 아내이자 빈센트와 테오의 서간집을 출간해 그를 알린 요한나 반 고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 위작의 제작 동기가 요한나가 반 고흐의 자살에 동기를 제공한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상화에 대한 그의 위작 주장은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의 독자적 가설은 서양권에서는 별달리 언급되지 않았다. 실제 고흐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고흐가 북방(즉 네덜란드)을 회상하면서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던 차에 총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고흐가 자살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생레미 시절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의 그림, 그리고 오베르에서 그린 최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때문에 결국 고흐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와는 별개로 오베르의 가셰 박사에 대한 비판도 많다. 고흐가 중상을 입고 왔을 때 가셰가 총알을 적출하는 외과 수술을 받게 했다면 살 수도 있었지만 외과 수술 반대론자였던 가셰가 외과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 고흐 자신도 가셰에게 그다지 신뢰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최근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도 다뤘다. 그 영화에서는 고흐가 "내가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겠지"라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나온다. 최근 또 다른 연구에는 사망 전 18개월 동안 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런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 이르게 됐을 것이라고 미술사가와 의학계 전문가들이 주장해오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68856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